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리 매뉴얼 (문단 편집) === [[야쿠르트 스왈로즈|야쿠르트]], [[킨테츠 버팔로즈|킨테츠]]의 첫 우승을 이끈 일본 시절 === 1976년, 매뉴얼은 32세라는 나이에 [[야쿠르트 스왈로즈]]에 입단하게 되면서 [[일본프로야구]]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뛰게 되었다. 첫 해에 새로운 리그에 적응을 하느라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지 못했지만 2년차인 1977년부터 리그 적응을 완료하며 타율 .316, 42홈런 97타점의 뛰어난 성적으로 야쿠르트의 주포로써 맹활약했고, 이 해 야쿠르트도 창단 이래 최초로 리그 2위를 기록했다. 다음 해인 1978년에도 타율 .312, 39홈런 103타점으로 활약을 이어갔고, 이 해 야쿠르트는 [[와카마츠 츠토무]]-[[오오스기 카츠오]]-찰리 매뉴얼-[[스기우라 토오루]]로 이어지는 강력한 클린업을 구축하며 구단 사상 처음으로 [[센트럴리그]] 우승을 거둔 데 이어 [[일본시리즈]] 우승까지 달성하는 최고의 한 해를 보냈다. 그러나 당시 야쿠르트의 감독을 역임했던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은 매뉴얼의 느린 발과 엉성한 수비실력을 지적하며 그를 높이 평가하지 않았고, 당시 좌완투수가 필요했던 야쿠르트의 사정에 따라 매뉴얼을 [[킨테츠 버팔로즈]]의 [[칸베 토시오]]와 맞바꿨다. 그 결과 야쿠르트는 이듬해인 1979년 공격력 악화로 인해 히로오카 감독이 시즌 도중 사퇴하는 내홍 끝에 최하위로 추락하며 [[노무라 카츠야]] 부임 전까지 암흑기에 빠지고, 반대로 킨테츠는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를 얻으며 기나긴 암흑기를 깨고 [[퍼시픽리그]]의 강팀으로 거듭나게 된다. 1979~80년에 매뉴얼은 최고의 퍼포먼스를 보여줬는데, 특히 1979년 시즌에는 97시합 타율 .324 '''37홈런''' 94타점, '''OPS 1.149'''[* 당시 장타율이 무려 '''.712'''에 달했다. 적은 출장수를 생각해도 놀라운 기록.]를 기록하며 [[양대리그]]제 이후 외국인 선수로써는 역대 최초 MVP 수상을 달성했고 같은 해 킨테츠를 창단 이래 첫 [[퍼시픽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오 사다하루]], [[장훈(야구선수)|장훈]] 같은 경우는 [[외국]] 국적이긴 하나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 및 학교 진학까지 모두 거쳤기 때문에 일본인 선수와 동등하게 간주된다.] 시합수가 적은 이유에 대해 일본 시절 매뉴얼의 승부근성이 나타난 에피소드가 있는데, 1979년 시즌 도중 [[롯데 오리온즈]]의 [[야기사와 소로쿠]]가[* 은퇴 후 [[카와사키]]에서 [[치바]]로 [[연고지 이전]]을 한 [[치바 롯데 마린즈]]의 초대 감독을 1992~1994시즌 도중까지 역임했다.] 던진 빈볼을 맞아 당시 수술 시간만 5시간 반이나 걸리는 심각한 턱뼈 골절상을 당해서[* 사실 일본에 오기 2년 전인 1975년에 강속구에 턱을 맞아 턱벼가 산산조각난 적이 있어서 안 그래도 조심해야 하는 부위였는데 이미 망가진 턱에 또다시 공을 맞는 바람에 턱뼈가 부서져 나가다시피 했고 안면이 심하게 망가져 못쓰게 될 뻔했다. 이 때문에 굉장히 화가 나서 병원으로 찾아와 사죄를 구하려던 야기사와 소로쿠와 롯데 구단 관계자들의 사과를 단호히 거부했을 정도였다.] 복귀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생겼고 가족들도 부상을 염려하여 일본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는 것에 반대했지만[* 본인도 부상이 심했던 탓에 처음엔 [[미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고려하긴 했다고 한다.], 결국 킨테츠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는 말과 함께 부상이 완치되지 않았음에도 출장을 강행했고, 97시합 출장에 그치긴 했지만 상술한 호성적과 함께 팀의 첫 우승을 이끌어냈다. 여기서 다시 주목해야 하는 점은 97경기만 출장했음에도 홈런왕은 물론이요 리그 MVP까지 따냈다는 점인데, 지금보다 외국인 선수에게 평가가 박했던 당시 시대상에다 부상으로 인해 출장 수가 적었음에도 이러한 핸디캡을 극복하고 리그에서 가장 뛰어난 성적을 기록했음을 세간에서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다. 부상을 당한 후 매뉴얼은 [[검투사 헬멧#s-2|야구 헬멧에 미식축구 페이스마스크를 붙인 특수 헬멧]]을 쓰고 경기에 나섰는데, 이 때 많은 일본 야구팬들이 그 모습에 놀라 [[아카오니]]라는 별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파일:external/blogimg.goo.ne.jp/2bcddd5e3f8f49ecf7c4a0ed992f29ad.jpg]] 다음 해인 1980년엔 타율 .325 '''48홈런 129타점, OPS 1.075'''을 기록, 홈런-타점 2관왕을 수상하며 [[퍼시픽리그]]를 제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성적으로 [[킨테츠 버팔로즈]]의 2년 연속 [[퍼시픽리그]] 제패에 공헌했다. 다만 이러한 활약에도 불구하고 당해 리그 MVP는 아쉽게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신인 [[투수]] 키다 이사무에게 돌아가며 2년 연속 수상엔 실패했는데, 외국인 선수에 대한 텃세라기보단 이 해 키다가 '''22승 225탈삼진 승률 .733, ERA 2.28'''으로 4관왕을 찍으며 신인으로썬 10년 후의 [[노모 히데오]]와 비견할 만한 엄청난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에 키다의 임팩트에 밀려 수상에 실패한 것에 가까웠다.[* 다만 키다는 이 시즌 후엔 기대치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부상 및 부진에 헤메다 통산 60승 71패의 성적을 남기고 1990년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은퇴했다.] 그렇게 킨테츠를 2년 연속으로 [[일본시리즈]]로 이끌었지만, 2번 모두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게 3승 4패로 아쉽게 패퇴하면서 끝내 일본시리즈 제패는 이뤄내지 못했다. 특히 당시 [[일본시리즈]]에 [[지명타자]] 제도가 없었던 것이 뼈아팠는데 지명타자가 없는 것 때문에 공격력은 뛰어났지만 수비력이 약했던 매뉴얼을 주포로써 써먹기 위해 킨테츠는 어쩔 수 없이 [[우익수]]로 기용해야 했고, 결국 매뉴얼은 타석에서의 활약을 안 좋은 수비로 번번히 까먹으며 팀의 우승 실패의 한 원인이 되고 말았다. 여하튼 자신을 필요로 하는 팀에게 어떻게든 첫 우승을 안기고 싶었던 매뉴얼이었지만 1980년을 끝으로 킨테츠에서 퇴단하게 되는데, 당시 엄청난 자금력으로 좋은 선수들을 싹쓸이하던 [[세이부 라이온즈]]가 [[시카고 컵스]]의 강타자 [[스티브 온티베로스]][* 홈런은 적었지만 메이저리그에서 8년 간 주전 및 백업으로 뛰면서 2193타수를 기록할 동안 1이 넘는 볼삼비를 기록할 만큼 준수한 선구안으로 OPS 8할대를 찍기도 했고, 일본에서도 성공적으로 안착하며 6년 동안 홈런은 적었지만(6년 통산 82홈런, 커리어하이 20홈런) 4년 연속 규정타석 3할을 찍을 정도로 준수한 컨택과 볼넷이 삼진보다 많을 정도의 미친 선구안을 보여주며 6년 평균 OPS가 .876에 OPS 9할 대를 3번이나 찍었다.]를 3년 100만 달러 계약이라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입단시켰다는 소식을 듣자 매뉴얼도 킨테츠에게 일본 최고의 외국인 선수에 걸맞게 다년 계약을 해줄 것을 요구했지만 자금 사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던 킨테츠는 단년 계약을 제시하며 매뉴얼의 제안을 거절했고, 결국 구단과의 관계가 틀어지며 매뉴얼은 [[히로오카 타츠로]] 감독이 사임한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돌아왔다. 그리고 킨테츠는 이듬해인 1981년에 매뉴얼이 떠난 직후의 야쿠르트처럼 리그 최하위로 추락하며 1989년 다시 [[퍼시픽리그]] 우승을 달성할 때까지 9년 간 우승 없이 중상위권~하위권을 오가는 부진을 겪어야 했고, 매뉴얼 역시 이전보다 부진한 성적으로 1981년을 끝마친 채 그 해를 마지막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